대한수면호흡학회

메뉴열기 메뉴닫기

Good Sleep은 매년 1월, 5월, 9월 발간 예정입니다

수면잡학사전

수면잡학사전

전남대학교병원 성충만

[알아두면 쓸데없는 수면 잡학사전]
양 한 마리 세다 밤새운 당신에게, 동양의 '수식관'을 처방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 어두운 방에 누워 뒤척일 때, 누구나 한 번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 수면 유도법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과연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을까요?

12세기 스페인 문헌에 등장한 '양 세기' 우화


'양 세기'의 기원은 흔히 호주의 양치기나 영어 단어의 발음(Sheep-Sleep) 유사성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출처는 12세기 스페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2세기 초 유대계 학자 페트루스알폰시(Petrus Alphonsi)가 저술한 『성직자의 규율(DisciplinaClericalis)』에는 아주 흥미로운 우화가 등장합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왕을 위해 이야기꾼은 여러 편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여전히 잠들지 못한 왕이 이야기꾼에게 "내가 잠들 수 있도록 아주 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이야기꾼은 꾀를 내어 이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옛날에 한 부유한 상인이 시장에 양을 사러 갔다가 양 천 마리를 샀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을 만났는데, 물결이 너무 거세어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강변을 한참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양 세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나루터를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인은 양들을 한 마리씩 한 마리씩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들려주고 나서, 이야기꾼은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잠시 후 왕이 이야기꾼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부탁하건대, 이야기를 끝맺어 주게."
그러자 이야기꾼이 대답했습니다.
"전하, 강은 매우 넓고 나루터는 좁사오니, 상인이 양을 모두 건널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연후에 이야기를 마저 마치겠나이다."
그러자 왕은 비로소 마음이 누그러져 잠잠해졌습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도 '지루하고 끝없는 단순 반복'이 우리 뇌를 지치게 만들어 잠을 부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반전: 양을 세면 오히려 잠이 깬다?


이후 영미권에서는 'Sheep'과 'Sleep'의 발음이 주는 최면적 암시 효과까지 더해져 양 세기가 불면증의 특효약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수면의학의 관점에서는 어떨까요?
2002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앨리슨 하비(Allison Harvey) 연구팀은 불면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그룹은 '폭포수나 휴가지처럼 평화롭고 기분 좋은 장면 상상하기'를, 다른 그룹은 '스스로 알아서 잡생각 떨쳐내기(연구팀에 따르면 이때 많은 환자들이 양 세기처럼 숫자 세기를 선택했습니다)'를 시켰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평화로운 장면을 상상한 사람들은 훨씬 빨리 잠든 반면,숫자를 센 사람들은 오히려 잠자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1, 2, 3... 순서대로 숫자를 세는 건 뇌의 스위치를 끄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작업 모드'로 켜두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뇌가 숫자를 세느라 쉴 틈을 못 찾는 사이, "아, 나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지? 내일 피곤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파고들어 오히려 수면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동양의 지혜: 밖의 양을 세지 말고, 안의 '숨'을 세라


그렇다면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동양에서는 잠이 안 올 때 무엇을 셌을까요? 놀랍게도 동양의 선조들은 외부의 동물을 상상하는 대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숨(호흡)’을 세었습니다.

이를 불교 및 동양 명상에서는 '수식관(數息觀)'이라고 부릅니다. '셀 수(數)'에 '숨 쉴 식(息)', 즉 자신의 들숨과 날숨의 횟수를 천천히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명상법입니다.

이 동양의 지혜는 현대 생리학의 이완 요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머릿속으로 가상의 양을 그려야 하는 서양의 방식은 '시각적 각성'을 유발하지만,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것에 집중하는 수식관은 미주신경을 자극하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합니다. 심박수가 떨어지고 근육이 이완되면서 우리 몸은 자연스럽게 수면의 문을 열게 됩니다. 억지로 숫자를 세며 뇌를 혹사시키는 서양식 방법과 달리, 동양의 숨 세기는 긴장한 몸을 사르르 풀어주는 진짜 과학적인 생리적 수면 유도제였던 겁니다.

고대 명상에서 불면증 치료의 핵심으로 '마음챙김 수면치료'


동양의 선조들이 실천했던 '수식관'이나 현대 요가의 명상 호흡법(Pranayama)은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현대 의학은 이 고대의 지혜를 적극 수용하여 과학적인 치료법으로 정립했습니다.

1970년대 매사추세츠 의과대학의 존 카밧진(Jon Kabat-Zinn) 박사는 불교와 요가의 호흡 명상법을 통합해 종교적 색채를 빼고, '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완화(Mindfulness-Base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을 창시했습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으로 폭주하며 끊임없이 잡념을 만들어내는 '뇌의 공회전(Default Mode Network)’을 멈추는 가장 확실한 스위치가 바로 '현재 일어나는 호흡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현대 수면의학에도 곧바로 도입되었습니다. 기존의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에 이 마음챙김 명상을 결합하여, 아예 '마음챙김 수면치료(Mindfulness-Based Therapy for Insomnia)'라는 특화된 공식 치료 프로토콜로 발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마음챙김이 추상적인 심리 기법이 아니라 '호흡'이라는 물리적 닻(Anchor)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내일 망했다"라며 폭주하는 뇌를 멈추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내 아랫배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는 호흡의 감각'에만 온전히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잡생각이 떠오르면 '아, 내가 딴생각을 했네' 하고 가볍게 넘긴 뒤 다시 숨소리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마음챙김을 위해 천천히 숨을 쉬는 순간, 뇌의 불안(인지적 각성)이 잠잠해지는 것은 물론, 폐가 부풀며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신체의 긴장(생리적 이완)까지 함께 풀립니다. 오늘 밤은 억지로 양을 세지 마시고, 그저 편안하게 나의 숨결을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 문헌]
1. Hulme WH. Peter Alphonse's DisciplinaClericalis (English Translation). Western Reserve University Bulletin. 1919;22(3):30.
2. Harvey AG, Payne S. The management of unwanted pre-sleep thoughts in insomnia: distraction with imagery versus general distraction.
Behav Res Ther. 2002;40(3):267-277.
3. Jerath R, Edry JW, Barnes VA, Jerath V. Physiology of long pranayamic breathing: neural respiratory elements may provide a mechanism that explains how slow deep breathing shifts the autonomic nervous system. Med Hypotheses. 2006;67(3):566-571.
4. Ong JC, Manber R, Segal Z, Xia Y, Shapiro S, Wyatt JK.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of mindfulness meditation for chronic insomnia. Sleep. 2014;37(9):1553-1563.
5. Kabat-Zinn J. Full Catastrophe Living: Using the Wisdom of Your Body and Mind to Face Stress, Pain, and Illness. Revised ed. Bantam Books; 2013.